한국 교회 내에서의 무슬림 선교의 양극화의 현실과 극복
한철호(선교한국 파트너스)
들어가는 말
전 세계적으로는 9.11사태 이후 무슬림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었지만, 한국교회의 경우는 3-4년 전부터 몇몇 이슬람 사역자들이 한국에서 증가하는 무슬림인구의 증가에 대한 경각심과 9.11 이후 가속화된 이슬람과 서방 세계의 대립관계를 연계시켜 설명하면서, 한국교회 안에 무슬림에 대한 접근이 심각하게 양극화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 문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외국인 근로자 유입으로 인해서 한국 사회 안에 자연스럽게 무슬림 인구가 늘어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과 서방 세계의 대립관계를 무비판적으로 한국 사회에 투영하면서, 어느날 갑자기 늘어난 무슬림들을 보고 놀라게 되면서 잇슈가 된 것 있다. 특히 몇몇 선교사들과 이러한 현상을 흑백논리로 접근하기 쉬운 위치에 있는 기독 정치인들 혹은 교계단체들에 의해서 한국사회에 증가하는 이슬람인구에 대한 관심이 하루 아침에 극대화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정상적인 반추의 과정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한국교회는 일부 왜곡된 정보와 선동적 접근, 그리고 신학적 차이에 의해서 한국에서의 무슬림에 대한 이해는 곧바로 심각한 상태로 양극화되어 버린 것이다.
이 문제를 논의하는데 있어서 먼저 몇 가지 전제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물론 모든 종교가 다 그렇게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그 가장 중요한 믿음의 역사적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이 사건은 기독교가 사랑으로 만 승리 할 수 있다는 근거를 역사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둘째,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선교는 앤드류 월스(Andrew Walls)의 관찰처럼 항상 주변(연약함)에서 중심(강함)으로 이동했지, 중심에서 다른 중심으로 복음화 한 역사가 없다는 것이다. 즉 기독교 선교는 한번도 힘으로 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19-20세기 기독교 선교가 서구의 힘에 의해서 진행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착시현상이다. 서구의 힘에 의해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그런 힘을 가지고 접근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복음의 진보는 그 안에서 연약함을 가지고 접근한 사람들의 헌신 때문이었다. 셋째, 그렇기 때문에 선교는 어떤 프로젝트나 캠페인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구선교는 본질적으로 분석과 대안 마련과 프로젝트에 의한 실행의 단계를 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힘에 의한 선교가 일어나게 된다. 특히 서구의 기독교왕국(Christendom)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타종교는 개종의 대상이지 회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서구 기독교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대립관계에 있었던 무슬림에 대한 포교는 그들을 개종해서 기독교왕국으로 편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개종이 아니라 회심이다.
무슬림 선교에 관련된 한국교회의 이슈들
첫째로, 타문화권 선교에 대한 이해 부재이다. 우리에게 선교가 기본적은 타문화권 사역이라는 이해가 없거나 희박하다. 선교가 타문화권 사역이라는 말은 우리가 자신을 객관화 할 수 있을 때 그 사역에 효과적인 참여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한국선교의 가장 큰 문제는 선교하는 한국인(선교사, 교회)이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있는가의 문제이다. 한국에서 모슬림에 대한 양극화된 생각을 가지게 된 원인이 여기에 있다. 국내의 이슬람 문제를 다룰 때 제일 먼저 회자된 단어가 “이슬람 쓰나미”였다. 한국 사회에서의 무슬림의 증가를 쓰나미라는 시각으로 본 것 자체가 우리를 객관화하지 않은 결과이다. 한국에서 무슬림 인구의 증가는 세계화로 인한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특별히 한국사회가 외국인 근로자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결과이지, 무슬림들이 한국을 이슬람화하기 위한 의도적인 목적을 가지고 몰려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물론 일부 그런 세력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한 개이던 모스크가 열 개가 되고, 기도처가 백 개를 넘어섰다는 말을 객관화해서 본다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분노해야 할 일이 아니다. 세계화로 인해 돈을 벌기 위해 한국 땅에 대거 들어온 무슬림들이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모스크를 더 짓고 모이는 것은, 마치 미국으로 간 한인들이 모이기만 하면 한인교회를 세우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한국에 늘어나는 무슬림인구와 그들이 한국에서 보여주는 삶의 방식(모스크 짓기, 한국여인들과 결혼하는 것이 소망이 되는 일, 한국 땅에 정착하려고 무슬림으로서 살아가려고 하는 일 등)을 공격적인 요소로 보기 보다는 한국교회가 그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로 보는 시각 변화가 먼저 있어야 한다.
둘째, 바른 역사의식이 필요하다. 앞에서 언급한 타문화권 선교 이해의 부재와 유사한 말 일 수도 있지만, 기독교가 어떻게 선포되었고, 혹은 어떻게 했을 때 복음의 진전이 일어나지 못했고, 오히려 타 종교에 의해서 역습을 당했는가를 잘 살피는 역사의식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무슬림과 우리가 다가가야 할 무슬림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서구의 기독교왕국(Christendom)과 이에 대립한 세력으로서의 이슬람과의 관계로 이슬람의 역사를 보게 되면, 결국 갈등 구조에서 벗어 날 수 없다. 서구와 이슬람이 아닌 비서구의 관점에서 이슬람을 보는 새로운 역사 해석의 인식이 필요하다. 앞으로 부정할 수 없이 한국사회는 다원화될 것이다. 종교적 영역에서도 그럴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슬람이 한국사회 안에 정착되는 과정에서 어떤 궤적으로 그릴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다. 한국사회 안에 이슬람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가장 민감한 공동체는 기독교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과 같이 개방된 사회에서 무슬림들의 한국사회 정착 자체를 거부할 방법도 권한도 없다. 문제는 이런 현실을 인식하고 어떻게 효과적으로 대처할 것인가이다. 왜 우리가 한국 사회 안에서의 무슬림의 증가에 그렇게 민감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식 분석이 필요하다. 한국사회 안에서 한국교회가 대립적 관계에 서 있는 다른 종교에 대해 교회가 어떻게 반응해 왔을 때 그들과 화평을 누리면서도 그들에게 복음의 확장이 일어난 경험이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러한 경험이 이제 새롭게 강력한 종교세력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있는 이슬람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는 어떻게 나타나야하는가 대한 세밀한 논의가 필요하다.
셋째, 결국 이슬람에 대한 이해와 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 필자는 이슬람의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 모르지만 이슬람에 대한 이해와 해석 또한 너무 천차만별인 것 같다. 그것도 구체적이고 설득 가능한 데이터나 자료를 가지고, 이슬람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보다는, 개인의 사역 경험이나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지식을 가지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물론 우리 가운데 이슬람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학자나 연구가들이 많지 못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따라서 시급한 것은 이슬람에 대한 깊숙한 이해를 단지 포교적 관점 뿐 만 아니라 사회학적으로 역사적으로 문명사적으로 이해하고 접근하는 (서구의 시각이 아닌) 노력과 그 결과물이 만들어 질 때 한국교회가 이슬람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실천적 대안이 나오게 될 것이다.
이슬람 선교에 대한 한국선교사의 접근
일반적으로 무슬림을 향해 나아가는 선교사들도 앞에서 언급한 시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또한 전략적으로 몇 가지 새롭게 고려해야 할 부분이 있을 것이다.
첫째, 성육신적으로 다가가야 한다. 역사 속에서 무슬림선교가 성공한 경우는 레이모드 룰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성육신적 선교를 통해서만 진정한 돌파가 가능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다른 지역이나 종교권도 마찬가지겠지만 이슬람권 선교는 장기적인 시간과 삶의 투자가 없이는 불가능 할 것이다.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이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사역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진정성을 가지고 장기적으로 다가간다면, 분명히 돌파는 일어날 것이다. 문제는 선교를 삶이 아니라 시스템과 프로젝트로 접근하는 것에 익숙해 있는 우리들이 과연 얼마나 성육신적 삶의 선교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는 우리가 선교사로 나가기 이전의 문제이다. 필자의 제한된 경험이라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정말로 우리 선교사들 가운데 이슬람권의 한 지역(공동체)에서 한 눈 팔지 않고. 끈덕지게 그들의 풀뿌리 삶 속으로 들어가려고 수고하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이들이 생각보다는 많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진정한 제자도의 삶이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날 때, 그런 삶을 경험한 이들이 선교사로 나가게 될 것이다.
둘째, 지역에 따라 E2 전도 접근이 더 용이 할 수 있다. 한국 선교사들이 무슬림전도는 대부분 E3 선교이다. 최근 주목해 볼만한 결과 중에 하나는 필리핀 민다나오의 무슬림 선교가 크게 확장되었는데, 그것은 E3 전도 보다는 E2 전도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즉 민다나오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민다나오의 무슬림은 대립과 갈등의 대상이었으나, 민다나오의 그리스도인들이 선교적 사명을 깨닫고 무슬림들에게 접근하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 결과 민다나오의 과거 무슬림사역자는 대부분 E3 사역을 하는 외국인 선교사들이었으나, 이제는 무슬림사역을 하는 필리핀 사역자들이 증가하면서 놀라운 무슬림 회심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MBB 출신의 사역자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무슬림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생적 공동체가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선교사들이 관심을 가져 볼만한 시도이다. 한국선교사들이 문화적 간격이 너무 큰 무슬림들에게 E3 접근을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많은 지역의 경우 E2 전도를 시도해 볼 수 있는 지역이다. 대부분의 동남아시아권 지역이 이에 해당 될 것이다.
맺으면서
필자가 짧게 국내외 무슬림 선교와 관련된 개인적 의견을 나눴는데, 한국사회와 교회 안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무슬림 인구의 확장은 무슬림선교에 많은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 너무나 갑자기 가까이 와버린 그들에게 대해 정서적 대립각을 세움으로서 정작 무슬림을 사랑과 복음 전파의 대상으로 보기 보다는 적대적 세력으로만 보는 시각이 너무 압도해서 기독교인들과 그들 간의 심리적 간격이 너무 멀어져 버렸다. 이 간격을 좁히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은 선교라는 관점에서 보면 너무 아쉬운 일이다. 그들이 우리의 영적 원수인 것이 분명한 것처럼 그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명제도 분명한 것이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명령이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삶이 우리의 삶과 사역 속에서 재현될 때만 가능할 것이다.
출처: 미션파트너스 - http://missionkoreapartners.org/han-chulho/%ED%95%9C%EC%B2%A0%ED%98%B8-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