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권 선교 전략들
엄요셉 선교사 > 아시아
불교권 선교에는 특별한 전략이 필요하다
세계적 종교로 탈바꿈 하고 있는 불교권 선교에 특별한 전략이 필요하다. 매스컴을 통해 왕왕 들려오는 불교와 기독교의 접촉은 불상을 훼손하고 방화하며 낙서를 하거나 그들이 귀히 여기는 성물(聖物)에 십자가를 긋거나 하는 등의 사건 사고 기사이다. 복음 전도도 마찬가지이다. 불교종단의 비리나 승려의 사생활을 불교인 양 공격하는 대립과 투쟁적인 전략들이 주효한 것처럼 여긴다. 여기서는 불교권 복음전도를 위해 여러 전문가들의 견해를 정리해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선교 대상으로서의 불교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불교인을 포함한 모든 타종교인들도 기독교 선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방인도 사랑하신다. 그들도 구원과 하나님의 사랑의 반열에 서기를 기대하신다. 진취적인 교회는 영원히 불교도들과 만날 수 없는 평행선만을 고집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또한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주어진 과제이기도 하다.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에 의한 구원을 추구하는 타력 구원의 기독교와 자신의 노력과 깨달음에 의한 자력 구원을 이야기하는 불교와는 전혀 공통분모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은 반드시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며, 저들의 영혼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분명히 어떤 방법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을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종교다원주의학자들은 ‘대화’라는 방법을 제시한다. 물론 대화의 시도가 방법일 수도 있다. 또 그렇게 하여야 한다. 한 가지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말하는 대화의 ‘목적’은 반드시 수정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단순한 공통점을 찾는 것만이 우리가 말하는 대화의 목적이 아니다. 공통점보다 차이점에 대한 비교 설명이 그 자체로서 충분한 전도 수단이 되며, 구체적인 선교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미지근하고 개성이 없는 것보다는 타종교가 근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 내지는 확고한 복음관이 선교적 측면에서 훨씬 더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역사학자 토인비와 같은 사람은 기독교의 관용성이 오히려 기독교를 기독교답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 적이 있다.
“오늘날의 기독교도들이 미래를 바라볼 때에 관용과 겸비로 대하려고만 한다면 자신 있게 미래를 향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중대한 점은, 우리가 광신주의에 빠지지 않고도 신념을 가질 수 있고, 우리가 오만이라든지 자기중심주의라든지 자만심이 없이도 믿고 행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선교전략이나 대화의 중요한 이니시어티브가 기독교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뚜렷한 신앙관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타종교인들로부터 배타성이 강하다는 인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교인들도 우리들의 분명한 복음 전도의 대상자들이므로 그들이 믿는 불교에 대한 상식을 알아야 하는 것은 틀림없으나 그들의 종교적 교리를 통하여 괜한 종교적 우월감으로 어설픈 논쟁을 일삼는 것은 오히려 선교에 방해가 될 뿐임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선교전문가가 본 불교권 선교전략
첫째, 불교권 선교전략은 사역자의 인격에서 시작한다. 어느 종교든지 마찬가지지만 불교권에서의 사역자는 신뢰성과 통전성이 요구된다고 헤셀 그레이브는 지적한다. 즉, 불교는 종교인을 생각할 때 친절을 베푸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사역자는 친절하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특히 불교는 세상의 부정(否定)과 물질 부정의 종교이기 때문에 사역자가 분에 넘치는 생활을 하면 도(道)를 실천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절제와 검소한 생활의 본을 보여 주어야 한다.
둘째, 사역자는 불교의 용어와 개념을 잘 이해하고, 불교 용어와 교리를 접촉함에 있어서 고도의 지혜와 지식이 요구된다. 필립 샤프는 불교와 유교권의 사역자는 공부한 사람이 요구된다고 하는데, 이 점에서 불교의 교리에 대한 기본적 지식이 절대 요구된다.
셋째, 사역자는 전도할 때에 불교의 경전에 나타난 교훈을 접촉점으로 하여 불교도들에게 전도해야 한다. 석가모니는 그의 교훈을 많은 비유와 예화로 일관하여 이해를 돕지만 또한 듣는 자가 스스로 깨닫도록 하였다. 성경에서 예수님도 많은 비유와 상징을 통하여 진리를 전파하셨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또한 사역자는 그 나라의 역사와 종교적 관습, 문화를 잘 알아 복음과의 접촉점을 삼을 수 있어야 한다.
넷째, 불교 문화권에서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서는 불교 문화권의 사회적 구조의 이해가 요구된다. 특히 티벳 불교권은 가족적 공동체적 결집력이 강함에 따라 기독교로의 개종은 곧 가족과 공동체에서의 이탈, 배신을 의미한다. 따라서 개종은 희생이 요구됨으로 개종자로 하여금 담대한 마음을 유지시키는 것과 그가 공동체와 가족 가운데 뛰어난 자로 인정받도록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기회와 도전이 필요하다.
다섯째, 불교권 전도는 샤머니즘 지역의 전도와 같이 능력과 지혜의 전도가 요구된다. 불교는 무신론이라 주장하지만 실제는 자력과 타력 구원이 어울린 혼합종교다. 실제로 많은 신들과 형상들, 각종 귀신들과 영들을 의지하는 다신론적(多鬼論的-실제로 불교는 힌두교처럼 많은 신들과 영들을 그대로 계승하였고, 부분적으로는 나라와 지방의 각종 영들과 신들을 수용한 점에서 다신. 다귀론적이다)이기 때문이다.
(출처:종교다원주의와 타종교선교전략, 전호진,개혁주의신행협회,1997)
승려였다가 개종한 기독교 목사가 본 불교권 선교 관점
1. 신뢰성(信賴性)이 요구된다
티벳 불교권에서 영혼을 만나고 교제하며 복음을 전하는 과정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어쩌다 한 영혼이 주께로 돌아가면 그저 사랑스럽기만 해 이것저것 다 책임지지 못할 공수표를 날린다. 이 영혼을 확실히 잡으면 더 큰 어장을 만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물론 이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동기가 사람을 더 의지하려는 데서 오는 인간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개종만 하면 아라비안 램프를 주겠다”가 아니라 그를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의 자리로 안내하고(비록 그것이 해산의 수고같이 고통스러울지라도) 인내하며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지극히 간단한 방법이다.
2. 친밀한 관계의 형성이 필요하다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 전도자의 사고에는 승려를 비롯해 주술자, 영매자, 골수 불교신자들을 전도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마귀새끼같이 저주의 대상으로 보고 접근을 꺼려한다. 뿐만 아니라 사원을 향해 긍휼의 마음을 품고 축복을 선포하고 주관하는 권세를 향해 축출(逐出)의 선포도 감히 하지 못한다. 사원에 들어가기만 하면 마귀가 달려들 것 같아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는 먼저 그리스도와의 친밀함이 부족하기 때문이요, 그들 영혼을 향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적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를 긍휼히 여기시는데 우리는 두려워하고 꺼려한다면 결국 우리는 주와 상관이 없는 자가 아니겠는가.
3. 만남과 대화를 통한 복음의 증거가 필요하다
불교권 전도자 가운데는 불교 교리에 대해 기피하는 현상을 가진 자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보게 된다. 굳이 불교 교리의 이해가 아니라 하더라도 복음 증거에는 문제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교리의 이해 없이 덤벼든 전도자 중에는 열매가 적고 쉽게 낙심하고 지친다는 사실이다.
이는 주로 교리의 부족에서 오는 대화의 부족이 그 원인이다. 왜냐하면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내는 것(예, 구원의 진리)은 대화로 보기보다 독백에 더 가까워 상대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오히려 “불교에 대해 잘 모르는 이가 허튼 소리를 한다”고 여겨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결과를 낳기 될 때문이다.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기 위해서는 교리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가 만나는 많은 티벳 불교권 영혼 가운데는 물론 껍데기만 불교도인 경우가 있지만 필자와 교제하는 지식인 중에는 승려가 아니라 하더라도 교리에 대해 매우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있다. 이들을 위해서는 불교의 용어와 개념을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해야 할 필요와 가치가 있다고 본다.
물론 여기에는 고도의 지혜와 지식이 요구된다 할지라도 낙심치 말자.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신 이가 우리 편이지 않는가. 학자같이 알아듣고 말도 하게 하실 것이다. 그래서 교리 가운데 접촉점을 찾아 그들에게 나아가자. 상대를 변화시키고 설득시키려면 교리적인 간격을 좁혀야 하기에 더 깊이 있는 연구에 임하자. 그렇게 되면 수많은 불자(佛子)들이 자신의 신앙 현실과 불교 경전과 습관적 행위와의 모순과 거리감을 토로하게 되고 복음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교리의 이해 폭을 넓히는 것이 곧 그들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을 넓히는 최선의 방법 중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것은 곧 바울의 전략이기도 하다.
4. 사랑에서 나오는 이해와 실천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배를 다른 사람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실천 가운데 가장 요긴한 것은 그들을 향한 사랑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를 찾아오셨다면 우리도 그들에게 나아가지 못할 것이 있는가. 물론 쉬운 일은 아닌 줄 안다. 필자가 다니는 대학의 한 동료(티벳인)가 내게 “학비가 부족해 복학이 어려우니 조금(1000元-우리돈 13만원 정도)만 도와 달라”한다. 평소 그들이 자주 사용하는 수법인 줄 알기에 속는 줄 알면서도 한 가닥 희망을 품고 그 절반을 내어 주었더니 핸드폰으로 “당신은 나의 神입니다”라는 메시지가 오지 않는가. 그래서 다시 “내가 신이 아니고 내게 나와 당신을 향한 신이 계신데 그가 곧 그리스도 예수라” 그랬더니 다음부터는 일절 교제가 끊어졌다. 그래도 기다릴 것이다.
학비를 도와주는 것, 고아를 돌보는 것, 병든 자를 치료하는 것, 그들을 입양하여 자녀 삼는 것 등 그들의 필요를 채울 때마다 비록 속는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나아간다면 그들의 굳은 마음이 제하여지고 온유한 주님의 마음이 그들 가운데 임하시지 않겠는가.
5. 불교는 허무(虛無)로 시작해서 허무(虛無)로 끝나는 종교임을 이해시키는 전도 방법이 필요하다
불교는 열반을 수행의 궁극적 목표로 설정한 종교이다. 이 열반은 기독교의 ‘하나님 나라’와 대칭되는 곳으로 하나님 나라가 소망과 영생과 희락이 있다면, 열반(涅槃)은 절대적인 무(無), 곧 일체의 존재가 없는 공(空)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소망이 주께만 있음을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자.
6. 불교는 극락(極樂)세계로 향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극락세계는 불교 고유의 사상이 아니라 불교 이전 브라만 종교의 내세관(來世觀)으로, 사후세계로서 희락이 충만한 천계(天界)인 곳이다. 석가모니는 바로 이 브라만 종교를 개혁한 자로서 극락도 인연이 다하면 죽음이 있는 불완전한 세계로 규정하고 해탈의 교리를 주장한 것이다. 참된 천국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마련하신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없음을 잘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선교적 접근을 돕는 티벳의 선교 상황
-티벳의 현대화
현재 티벳을 선교하는데 있어서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종교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은 선교사들이 자유롭게 들어갈 수 없다는 점에서 하나의 장애 요소로 작용하지만 그러나 티벳 복음화를 위한 전초로서 중국 공산당을 통한 티벳 불교의 약화와 세속화 초래라는 면에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역사로 작용할 수 있다. 개혁개방이라는 중국의 정책적인 노선의 전환이 가져온 티벳의 현대화가 선교환경의 토대를 구축하는데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티벳은 중국 내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 중의 하나이다. 티벳 불교는 ‘발전’, ‘현대화’라는 개념 보다는 ‘윤회’와 ‘반복’, ‘인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개혁 개방정책을 통한 경제발전과 사회적인 공간의 확대가 필요하다. 티벳도 외부에 개방되어 일단 그 땅에 경제발전을 위한 기술과 기술자들이 들어가면서 복음이 함께 들어가고 말씀을 통한 교육과 또한 국제화에 대한 관심으로 문호를 개방하게 된 것은 기독교 선교의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티벳불교에 대한 기독교적 변증 필요
티벳의 정치와 종교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티벳 불교에 대한 기독교적인 변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본교(本敎, Bon)의 영향으로 불교가 재액초복 등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음을 상기하고 이에 맞는 기독교적 대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신칭의(以信稱義) 구원관을 어떻게 행위구원관에 철저한 티벳인들에게 갖도록 할 것인지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 밖에 티벳의 전통문화와 관습 중 그대로 유지해도 되는 부분은 잘 변별하여 그 문화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는 것은 복음과 잘 연결시켜 주도록 해야 할 것이다.
티벳 불교 /라마교에 대한 비평적 접근
라마교의 세계관에 대한 비평적인 접근은 여러 각도에서 가능하겠지만, 본 자료에서는 세 가지를 인용하였다.
첫째는 라마교의 인생관이나 구원관은 숙명론적인 결정론적이라는 것이다. 즉 그들은 환생의 교리라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현재의 고통은 과거의 업보로부터 오는 숙명적인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노력으로는 현재의 고통을 고칠 수 없고, 현재는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이 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관은 인간을 수동적으로 만들고, 현재의 자기상황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보다는 과거 탓으로 돌리는 수동적인 인생관에 머물게 한다. 자기개발의 능동적인 기회는 박탈된다.
둘째로 라마교는 계급적인 사회구조를 파생시켰다. 총카파가 종교개혁을 단행한 이후 라마교에서는 승려들 사이에 계급(階級)의 구분이 생겼다. 그 최상층부에는 약 4% 정도의 활불승려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활불승려들은 결국 환생과 활불의 교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지켜가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활불계층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오히려 일반인들은 이들을 뒷바라지 하는데 더 많은 노동력을 착취당할 뿐이다. 중국 공산당 혁명이 하층민들에게 환영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라마교가 티벳에서 발전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내면에는 라마교 이전에 존재했던 본교(本敎, Bon)의 샤머니즘적인 혼합(混合)의 요소가 축제나 의식에 스며있다.
라마교에 대해서 선교적인 접근을 할 때 처음에는 그들의 일반적인 관심사나 삶의 문제들을 가지고 접근한다. 그러나 대화가 깊어지면 복음적인 변증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이때 선교사는 가장 효과적인 핵심을 가지고 복음의 메시지를 설명하고 변증하여야 한다. 이에 대해서 본 자료에서는 인간의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이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영원하지 않은 세상에서 영원한 것에 대한 집착(執着)에 진리에 대한 무지의 상태에 있지 않고 죄성에 있다.
라마교를 향한 선교 대안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강조할 필요가 있다. 단 이 때에 그 라마교 신자들은 불교의 인간 율에 근거해서 예수는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십자가에서 죽은 불쌍한 사람으로 인식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복음 전달자는 예수가 전생의 업보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모든 우주를 창조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윤회의 사슬에서 고통당하는 인간을 구원하고 그 것을 절단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대신 보내신 것이며, 이 십자가의 보혈을 믿을 때에 라마교 신자도 비로소 모든 환생(윤회)의 고리로부터 해방되고 영원히 변치 않는 (윤회하지 않는)생명을 소유함을 말할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부활을 설명해야 한다. 즉 예수가 업보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요, 윤회의 사슬에서 인간을 해방하기 위해 왔고, 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부활로 증명됨을 말한다. 이때에 복음 전달자는 환생과 재생 그리고 부활의 차이를 말할 필요가 있다.
출처: 바울선교회 - http://www.bauri.org/gb/bbs/board.php?bo_table=stratege&wr_id=183&p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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